
옛노트에서
<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얼마 전, 고향집에 내려갔다가
다락방에서 뽀얗게 먼지 쌓인 박스 속에서
지난 추억을 하나 발견했어요.
빛바랜 편지 꾸러미 사이로 낯익은 노트 하나 눈에
들어왔어요.
여고시절 문예반 동아리에서 활동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노트엔 16년 전 무에 그리도
할 말이 많았는지...펼쳐 든 노트엔 오래 전 써내려간
엷은 회색빛의 글씨들이 빼곡하더군요.
스물이 되는 푸릇푸릇한 심정...
그때의 설렘과 묘한 흥분감이 일기로,
한 편의 詩로, 혹은 짧은 산문으로 곳곳에 남아있었어요.
그땐 당차게도 여류문인이 되겠다고...
참 당당했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감이 아니라
치기였음이 분명한 저만의 오만이었어요.
그 뒤로 일기를 쓰다말다...
결혼하고 아이 둘 낳고 살림하며 얼마전부터 맞벌이까지
하다보니 제 꿈은 영영, 아주 멀어져있고
대신 옛노트에 아련히 한 장의 사진처럼 추억으로만
남아 있었어요.
터무니 없는 공상이었을지라도 여전히,
꾸준히 꿈은 꾸어야 했어야 하는데...하는 후회와 자괴감.
남편의 사업실패와 친정 아버님의 대수술과 입원의 반복...
3년 여를 근심으로만 살아왔는데
이 작은 일이 나를 다시 옛추억, 아니 행복으로 초대하네요.
열심히 일하는 세상 남편과 나...
까르르 천사처럼 웃는 딸과 듬직한 아들 모습...
아! 그러고보니 이게 진짜 행복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여전히,
꿈은, 잊는게 아니라 잠시 접어둔 것이라고
제 자신을 위로하면서 살면...
훨씬 가벼울 것 같아요.
이 生의 무게가....
신청곡 : 거위의 꿈 - 인순이
마법의 성 -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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