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희의 꿈과 음악사이에

음악FM 매일 22:00-24:00

* 게시판 성격 및 운영과 무관한 내용, 비방성 욕설이 포함된 경우 및
  기명 사연을 도용한 경우 , 관리자 임의로 삭제 될 수 있습니다.
* 게시판 하단, 관리자만 확인할 수 있는 [개인정보 입력란]
   이름, 연락처, 주소 게재해주세요.
* 사연과 신청곡 게시판은 많은 청취자들이 이용하는 공간입니다.
  사적인 대화창 형식의 게시글을 지양합니다

어렵다.
혜신
2006.05.30
조회 26

내일이 선거일이라 도서관이 일찍 문을 닫았다. ─내일 있을 선거와 도서관의 폐관 시간의 연관성을 모르겠지만─ 일찌감치 집에 돌아와 문을 여니, 형언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수라장이다. 우리 집 고양이, 민이 녀석이 사료와 물을 잔뜩 엎질러 놓은 데다, 민이의 화장실을 확인해 보니 거기도 거의 전멸이다. 고무장갑을 끼고 주섬주섬 치운 뒤 새 신문지를 깔아주고 사료와 물을 다시 담아 둔다.

엄마는 오늘도 바쁘게 외출하셨는지 설거지가 잔뜩 쌓여 있다. 설거지를 한다. 한숨을 돌리고 민이 앞에 털썩 주저앉아 녀석의 턱을 톡톡 치며 말을 건다.

“정말이지 넌, 밥도 혼자 못 차려(?) 먹어, 똥도 혼자 못 치워, 다 좋으니까 하다못해 목욕이라도 좀 혼자 하면 안 되니?”

내가 생각해도 무의미하고 바보같은 짓이다. 한숨만 푹 쉰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이는 내 손길에 눈을 감고 고르륵댄다.


이달 초, 민이가 새끼를 낳았다. 이번이 두 번째 출산인데, 초산 때의 딱 두 배를 낳았다. 새끼는 모두 여섯 마리. 민이를 꼭 닮은 까만 털의 고양이들이다. 이름을 지어주어야 하는데 미루고 미루다보니 지금까지 와버렸다. 이제 곧 젖도 뗄 테고, 몇 마리는 다른 사람에게 분양을 해줘야 한다. 이젠 정말 이름을 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마리씩 꺼내어 나란히 줄을 세워 놓고 열심히 특징을 찾는다.

“얘는 민이 닮아서 꼬리가 짧고, 얘는 콧잔등만 하얗고…”

특징을 찾아서 이름을 지어주려 했으나 역부족인 것 같다.


지금껏 많은 개와 고양이들을 키워왔지만, 그 경험이 얼마가 됐든 이름 짓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네이밍 센스 제로에, 귀차니즘까지 만만찮은 주인 덕에 언제나 ‘내 새끼들’이 고생이다. 언젠가 한 번은 굳이 이름을 지어줄 필요가 있을까 싶어 키우던 개들을 이렇게 불렀다.

“넌 강아지 1이고 넌 강아지 2, 넌 강아지 3이야.”

그러나 이름이야 어찌 됐든 상관 없다는 듯한 그 맑은 눈동자들을 보며 죄의식 비슷한 걸 느낀 후론, 다시는 그렇게 동물들을 부르지 않았다. (미안했어 얘들아.)


가만, 근데 내가 민이 이름은 어떻게 지었더라?하고 돌이켜 본다. 아마 민이가 우리 집에 처음 왔던 즈음에 관심 있던 남자 배우의 이름을 따서 지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주인의 사심이 담긴 이름을 선물받고도, 내가 “민, 민아-”하고 부르면 언제든 “냐아-”하고 대답해주는 녀석이 고마울 따름이다.

엇, 잠깐. 그럼 민이 새끼들도 그런 식으로 이름을 지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얘는 규찬이, 얘는 적이, 얘는 한철이…”

문득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짓는 건 고양이에게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세 사람에게도 미안한 일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내 포기해버린다.

나는 다시 한 놈씩 콕콕 건드리며 마음의 대화를 시도해봤다.

“있지, 이름이란 건 생각보다 그리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너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되는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녀석들은 저리 가라는 듯이 앞발로 내 손가락을 밀쳐내곤 자기들끼리 뒤엉켜버린다. 결국 나는 다시 한숨을 푸욱- 쉬고 녀석들을 다시 정렬시킨다. 그리곤 생각나는대로 한 놈씩 불러 보았다.

“한놈, 두식이, 석삼, 너구리, 오징어, 육개장…”

꽤 그럴듯하다는 생각과 함께 왠지 모를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그대로 이름을 짓는다면 아마 누군가로부터 너무 이름을 막 짓는다는 핀잔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실없이 웃는 사이에도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가고, 나는 결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결단을 내린다.

“미안, 얘들아. 오늘은 안 되겠어. 내일 다시 생각해보자.”

이렇게, 나의 나태함으로 이미 약 한 달여 가량 미뤄진 네이밍 작업은 다시금 연기되고야 말았다.


왠지 오늘 밤 꿈에는 고양이 왕국의 야옹이 형사가 나타나서 미란다 원칙을 고하고 나를 포박해 갈 것 같다. 그리고 으리으리한 캣타워 꼭대기에 있는 대법원에선 이런 판결을 내리겠지.

‘반려묘에 대한 나태 죄와, 자묘(子苗) 작명 무한정 유예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냐옹- 탕 탕 탕’

댓글

()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깨끗한 댓글 환경에 동참해 주세요. 0 /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