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촌에서 눈물로 보낸 유년시절 기행
이일영
2006.03.09
조회 79
<나의 유년시절의 기행>



옛날 60년대 후반 너무도 궁핍했던 유년시절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때문에 우리가족은 2년단위로
이사를 해야만 했고 그래서 국민학교를 3차례나 옮겨다녔지요.
부산에서 1,2학년, 충남 연기에서 3,4학년,
강원도 양양의 탄광촌에서 5학년으로 다녔는데....

학교를 옮길때마다 제일 고역이었던 것은 아마도
아이들의 나의 사투리 말씨때문에 놀림을 당하는 것이었지요
특히 학교에선 국어시간만 되면 가슴이 조마조마 했는데
선생님이 얄굿게도 머리 푹 숙이고 있는 나를 지명해선
'네가 전학온 아이지? 어디 일어서서 한번 읽어봐!"하면
떨리는 가슴 억지로 진정시켜가며 읽다보면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웃음을 억지로 참는
소리가 들리면 궨스리 화가 나기도했지만...
그곳 사투리로 익숙해져 가는 만큼 친구들과의 관계도
더욱 친해져갔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아버님이 전역을 하시고
어머니와 우리 4형제를 그대로 남겨둔채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한뒤 부터
논 밭떼기도 없는 우리가족은
우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날도 많았습니다.

배고픔을 못이겨 허구헌날 어두운 밤을 기다려
어린 동생과 인근 감자밭을 다니며 서리를 해와야 되었지요
그 감자는 우리들의 식사대용이었고
도시락도 찐감자를 이겨 담은것을 싸가지고
10리길이나 되는 학교를 걸어더녔습니다.

또 어떤날은 어머니와 뒷산으로 올라가 쐐기에 쏘여가며
도토리를 한보재기씩 따가지고 내려와서 어머니가
도토리묵을 해먹었던 기억들...

어느날 5살짜리 남동생이 배가 아프다며 울고 오는데
무엇을 먹었는지 배가 불쑥나와 있어 무얼 먹었느냐고 물었더니
동네 누나들이 소꼽장난하던 흙을 밥인줄 알고 먹었던 기억들...

시간이 많은 여름 방학때면 동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상표딱지를 주우러 다녔던 일, 산 골짜기에 있던 무슨 공장주위를
돌아다니며 고철과 구리선등을 주으러 다녔던 기억,
최고의 놀이는 검은 석탄이 산처럼 높이 쌓여있는 곳에 올라가
넓적한 바위를 엉덩이에 깔고 미끄럼타며 내려오는 놀이였습지요^^*
온몸이 석탄 가루로 검정뎅이가 되어 어머니에게 혼지검이
나지만 그 즐거운 놀이는 계속되었지요

그리고 산중턱에 자리한 호수에서 수영을 하는 즐거움은
무더운 여름의 놀이로는 단연 최고 였습니다.
물속에 들어가 잠수하는 수영을 특히나 좋아 했던 나는
수영을 하기전에 먼저 물속의 깊이를 재려고 물속에서
손을 높이치켜들고 서서 쭉 내려가면 발끝이 언제쯤 닫는지
시험해보는 것인데 호수에서 조금만 더들어가면 한참을 내려가도 발끝이 안닿아 얼른 다리를 저어 급히 올라오곤 하지요
그래도 그땐 물이 무섭지가 않았지요
가끔은 수영하고 나오면 몸의 이곳 저곳에 거머리가
붙어 있을 때도 있지만 손에 흙을 뭍쳐 뗴어내면
떼어낸 자리엔 피가 술술 흘러나왔지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겨울이면 판자데기에 철사를 양쪽에 대고 못을 박아 고정시킨
썰매를 직접만들어 근처 개울가나 논으로 달려가서
땅거미가 질때가지 타기도 하고....
바람부는 날이면 꼬리가 긴 가오리연을 만들어
친구들과 연날리기 시합도 하며 놀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납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더이상 먹고살기 망막하여
아버지가 계신 서울로 무작정 올라가기로 한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트럭을 얻어타고 정든 탄광촌을 떠나던날
동네친구들은 말로만 듣던 서울로 올라가는 우리를 부러워하며
트럭을 끝까지 따라오다 지쳐 차가 안보일때까지 손을 흔들던
아련한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신청곡) "이사가던 날",아니면 "연"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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