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애창곡]자녀 교육의 선두주자이셨던 아버지...
유복희
2005.09.22
조회 90
간수처럼 짜고 쓴 어머니 아버지의 눈물을 먹고...자식들은 실한두부 덩어리가 돼가나 봅니다....란말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을 아리게하는 표현같습니다.
잘 쓸 필요도 없고...솔직하게만 써달라는 영재님의 부담없는 말씀에 큰 용기를 얻어 두서없는 글 감히 올립니다.

읍내에서 덜커덩거리는 버스로 사십여분을 들어가고도 버스 타고 온 시간만큼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 가야 마을 입구에"범죄 없는 마을 "이란 간판을 볼 수 있는 조그만 마을 입니다.
어릴 적 마을 입구에 커다랗게 세워진 그 간판을 볼때면 여주군에서 유일하게 한 곳인양 얼마나 자랑스러웠는 지 모릅니다.
호랑이띠인 저의 아버지는 세살에 부모님을 여의고 큰할아버지댁에서 지내셨씁니다.

아버진 저희 사남매를 앉혀 놓고 그 때 자라시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주 들려 주시곤 했습니다.
가끔씩 눈 물을 훔치시는 모습을 보고는 영문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부모 없는 설움을 받으셔셔 꽤 한이 맺히셨나봅니다
그럴때마다 술을 자주 드셨습니다.
저녁상이 거의 차려 질 즈음이면 우리 사남매는 아버지를 찾으러 동네 사랑방이라는 사랑방은 다 뒤지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포기하고 돌아와 밥 한그릇이 거의 바닥을 보일 쯤이면 아버지보다 먼저 밥상 머리에 와 있는건 아버지의 노랫가락이었습니다.

"가~련다~떠~나련다..어린 아들 손을 잡고~"
이 노래를 흥얼거리실때마다 어릴 적 못다 받은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셨던것 같습니다.

동네 누구네집 제사며...생일이며 모두 기억하실정도로 아버지는 머리가 총명하셨습니다.자식들 앉혀 놓고 친척간의 촌수,우리나라 지역의 수도이름 더 나아가서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국나라의 수도 이름을 줄줄 외시면서 가르쳐 주시곤 햇습니다.
그럴때마다 어머니는 "저 양반이 학교만 제대로 다녔으면 변호사쯤은 했을터인데...쯧쯧..."아버지의 좋은 머리를 인정해주셨습니다.그런 아버지는 예의 범절 또한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황소 한마리만 달랑 들고 집을 나가셔서 자수성가하신 원주에 사시는 큰아버지나 고모가 가끔 집에 오시는 날에는 어김없이 절을 시키셨습니다.어린 마음에 얼마나 쑥스럽고 창피하던지....우리 아버진 왜 그럴실까?하는 이해 부족에 그 자리만 피할 수만 있다면...하는 요행을 바랬던 적도 있었습니다.지금 생각하면 그게 얼마나 바른 자녀교육의 첫걸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생활력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그런 아버지의 안일한 태도에 어머니는 화가 나셨을 법도 하지만 그래도 자식들에게만은 "사람은 사람 노릇을 해야 된다"고 어릴 적 일러 주시며 보여주신 말씀과 행동은 지금 살아 가는데에 있어 많은 지침돌이 되었음을 느낍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고인이 되신 아버지의 노랫가락이 그릴울때면 고향을 찾아 가게 됩니다.마당이며 담벼락이며 들을 수 있었던 노랫가락 대신 선산에 묻혀 아무 말씀 없으신 아버지의 무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녁해가 뉘엿... 뉘엿 기울어 갑니다.
윗목에는 고구마깡(겨울에 고구마 보관을 위해)이 방의 반을 차지하고 아랫목엔 아버지, 어머니,큰언니,작은언니,오빠...여섯식구가 한 이불속에서 이쪽 저쪽 서로 이불 땡겨가며 서로의 발이 닿을 정도의 옹기종기 모여 자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장안3리 401번지"범죄없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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