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내게 있어 아버진"생활력도 없고,잦은 폭행,술중독자에 놀음만을 일삼던 그런 아버지가 전부였습니다.
한창 바쁜 농번기철엔 조금이라도 제때에 "참"을 내 오지 않으면 일하다 말고,집까지 쫓아와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참거리를 난장판을 만들기 일쑤였고,겨울철이면 뉘집 사랑방에서 화투놀음에,초저녁 아궁이에 불지피느라 청솔가지에서 뿜어 나오는 매운 연기는 늘 엄마 몫이었습니다.그런 엄만 설움에...자주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제대로 된 논밭이 없었던 저희 가족은 유일한 홍일점인 오빠의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큰집이 있는 강원도 원주 시내에 조그만 단칸방을 얻어 엄마는 "유성제면"이라는 국수공장에 식모로 일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아버지와 두살 어린 여동생은 여주 읍내에 방을 얻어 이산 가족으로 살게 되었습니다.이쪽 저쪽 두 집 방세에, 생활비,오빠학비....엄마의 한달 월급으론 감당이 안되었기에 늘 가불이라는 것에 엄만 떳떳치 못한 직장 생활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전 토요일 마다 연탄값과쌀값을 타러 원주에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도착해서도 엄마 회사에 다다르면 왜 이리 망설여 지는 것인지....한참을 망설인 후에야,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마중을 부탁하곤 했습니다.
"주방 아줌마"란 호칭에 익숙한 엄만 항상 앞치마를 두루고 계셨고,시도 때도 없이 당겨 쓰는 가불금은 늘어만 갔기에, 엄마의 모습은 기가 죽어, 어린 내가 봐도 안스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엄마의 피와땀이었던 몇푼의 돈을 손에 쥐고 돌아 오는 버스 안에선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당분간은 연탄과 쌀걱정은 안해도 되는 행복감에 "밀양쌀"한말을 사들고 오는 발걸음을 왜 이리 가벼웠던지.....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진 그 생활비마져 찾아 내 술을 드시고는 코까지 골며 아랫목에 큰대자로 누워 계셨습니다.
얼마나 미웠던지....밤하늘을 보며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내 아버진 15년 전...가장 추운 겨울 어느 날,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올해 4월... 사남매의 작은 정성으로 환갑잔치를 치루는 내내 엄마는 너무 행복해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힘들때 즐겨 부르셨던 노래 "어차피 떠난 사람"아마도 가족에게 그렇게 모질게 했던 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부르셨던 것 같습니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