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큰 도로로부터 족히,걸어 30분은 걸어야 닿을 산 꼭 대기에 있었습니다.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집을 "꼭 대기 집'이라 불렀습니다 집으로 닿는 중간지검엔 철로가 있어 어린시절 우리들은 마치 사선을 넘듯 철뚝을 넘어 꼭대기기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꼭대기집 바로 옆에는 상여집이 있어 전기 사정이 형편 없던 당시 내게 혼자 집에 있는 것은그 자체로도 공포요 가슴떨린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몸을 꼼지작 하십니다.꼭 대기 집으로부터 약 10 여분 걸어가야 마을 공동 우물이 있습니다.매일 서 너독에 물을 채워야 하는 어머니의 어깨는 늘 축 쳐져 있어 양동이가 때로는 땅에 질질끓리고 양동이 물은 집에 도착할면 늘 2/3에 불과 했습니다.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일하셨습니다.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관계없이 시장에 팔것이 있으면 뭐든 떼다 팔기도 하고 한날은 날잡아 동네 아줌마들과 산과 들로 나가 돈될 것을 뜯어 말리고 다듬기도 하셨 습니다.
그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학교에서 돌아 와 보니 집에는 누이도 동생도 없었습니다. 밤이 깊어가면서 난 공포에 떨었습니다. 방문을 죄다 열어제치고 짐짓 무섭지 않은채 노래도 부르고 소리도 지르고 일부러 소리를 덜그럭 거리며 인기척도 내 보았지만 한시간의 흐름은 마치 몇십년 처럼 무섭기만 했습니다.
동생과 누나는 아마도 어머니 따라 시장엘 나갔나 봅니다.
동생은 아직 어머니 품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고 누이는 아마도 어머니 에게 돈달러 조르러 갔을 겁니다. 분명 교복을 사야 했기에 학교의 시달림에서 이제는 반드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한 듯 엄나를 조르러 시장을 찾아 갔나 봅니다.
비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난 무서워 차마 어머닐 찾아 나서기도 두려웠습니다. 상여집을 넘어야 하고 철로를 건너야 하는 일은 마치 사선을 넘어 평화의 땅으로 가는 처럼 길고 길게 그리고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집을 가로 질러 조금 더 오르면 가파르지 않은 곳엔 잘 사는 김씨 아저씨 집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마다 나와 동생 누나는 그곳에 가서 드라마를 보러갔고 어머니는 주현미가 나온다 하면 그냥 우리들 손을 잡고 마실을 가셔서는 흑백 티비를 보며 간신히 벅찬 사는 일을 견뎌내셨습니다.
그날 밤도 어머니는 우산도 없이 머리에 똬릴 틀고 진즉 팔지 못한
물건을 이시고 양손에 누이와 동생 손을 잡고 '신사동 그사람"을 부르며 철로와 상여집을 돌아 나의 무서움과 공포를 덜어내 주셨습니다.
신사동 그사람
어머니의 노래는 그 자체로 희망이요 반가움이요 새 생명과 같았습니다
어머니의 노래
주현미 신사동 그사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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