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의 감성 사전]에 대한 서평 기사입니다.
들린아침
2002.12.27
조회 89
[책 리뷰] 영재의 감성사전

어렸을 때엔 지금보다 할 일이 참 많았다. 골목길 한 귀퉁이에서는 매일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딱지치기 토너먼트를 벌였다. 해질녘쯤이면 딱지대장이 정해지는데, 딱지를 잃은 아이들은 분을 참으며 밤새 내일의 대사(?)를 준비했다. 그것뿐인가? 달그랑거리는 구슬 을 한 주먹씩 가지고 다니느라 양쪽 주머니가 두툼했고, 각종 주사위 놀이와 동그란 딱지놀이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것의 많고 적음, 숙달의 정도는 그 또래의 자존심이었다. 이젠 모두가 빛 바랜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CBS 음악DJ 유영재가 펴낸 ‘영재의 감성사전’은 그래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책 속에는 책갈피에 끼워둔 단풍잎, 은행잎 같은 반가운 추억들이 있다. 공책들을 찢어 침을 발라 만든 딱지, 소풍날을 기다리게 만들었던 사이다, 미닫이문이 달려 있었던 흑백 텔레비전, 어머니 오실 때 놀래주려고 숨어 있었던 비키니 옷장 등 아스라한 기억이 되어버린 것들을 하나씩 낚아 올린다.

‘감성사전’에는 물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장발 남자와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는 데이트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는 80년대 풍경, 강시나 드라큘라보다 더 무서웠던 아이들만 잡아먹는다던 홍콩할매귀신, 폐품 수집과 쥐꼬리 수집, 어머니의 18번 ‘선창’등을 추억하는 글 하나하나는 삶의 기록인 동시에 사는 힘이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CBS 음악FM ‘유영재의 가요 속으로’에서 2002년 2월 1일부터 9월까지 방송된 150여 편의 글 중 100편을 구성작가 황미희와 유영재가 엄선한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엮은 이유는 두 가지다. ‘마음속에 간직한 추억의 앨범이 풍성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과 ‘어제를 통해 우리의 삶을 잠깐 돌아보자’는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생각해보면,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단지 그 현장이 실존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마음속으로 되살려내는 동안의 아련한 긴장감을 즐겁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심장이 두근거리고 뇌세포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경험은 이 때문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감성 사전’으로 옛 기억을 떠올리다가 문득 자신이 ‘남보다 먼저!’ ‘영리하게!’를 외치는 현대 사회 속에서 병들었음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책을 정말 잘 읽은 독자다. 이 책의 의미는 단순히 1970∼80년대의 텍스트의 전달이 아니라 우리를 치유하는 데 목적이 있다.

누군가는 젊은이는 꿈을 먹고살고 노인은 추억을 먹고산다고 했는데, 꼭 맞는 말은 아니다. 추억은 남녀노소가 삶을 살기 위해 섭취하는 공통된 에너지원이다. “되돌아본다는 것, 즉 ‘성찰’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여기’의 삶의 건강 여부를 스스로 진단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는 저자의 말은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바쁜 걸음을 재촉만 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낭랑한 종소리 같다. (유영재, 황미희 / 들린아침, 8,000원)

<김상만 기자 mlolv@mk.co.kr>

<시티라이프 제5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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