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이 엄청 많구나. 설거지하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물로 애벌 설거지한 그릇을 거품이 묻어나는 수세미로 닦고, 다시 물로 헹구고,
다 씻은 것을 식기 건조대에 쌓는 일의 반복.
뿌듯한 기분으로 식기 건조대에 수북이 쌓인 그릇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릇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접시 아래에는 큰 사발이,
큰 사발을 들면 작은 사발이, 작은 사발을 들어 올리면 컵이, 컵 안에는
종지가 종지 밑에는 술잔이 숨어 있었다.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그 그릇들을 보노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이 숨겨져 있고,
그 진실의 속내에는 또 다른 진실이 파묻혀 있을지 모른다는 술잔처럼
가장 깊숙한 곳에 은폐된 마음을 들추려면 제일 큰 그릇의 물기부터
말려야 한다는 축축한 마음을 말리는 일이 어디 쉽겠냐마는.
그릇이라고 하면 그릇이라는 말이 붙은 밥그릇이나 국그릇 따위가 떠오르지만,
사실 그릇의 종류는 한둘이 아니다. 놀랍게도 온갖 '통'과 '상자'도 전부 그릇의 일종이다.
"걔는 그릇이 작아."라는 말에서처럼 "어떤 일을 해 나갈 만한 능력이나 도량도 그릇이라고 하니,
좌우지간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그릇인 셈이다. 두 손을 모아 물을 떠서 세수할 때
그것은 손바닥 그릇이며, 당신을 향한 그리움을 품고 있는 마음도 깨지지 않는 그릇이다.
나는 식기 건조대에서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그릇 몇 벌을 꺼내고, 거기에 밥이며,
국이며, 반찬을 담았다. 마르기도 전에 다시 쓰이는 그릇의 삶이 참 고단하겠다 싶었다.
그간 여기에 얼마나 많은 음식을 담아 먹었을까.
그사이 그릇들은 얼마나 많은 설거지를 견뎌냈을까.
언제나 정갈하게 자신을 비움으로써 남을 먹여 살리는 그릇들.
그에 비하면 어느 마음도 오래 머물지 못하는 내 마음은 깨진 그릇이 아닐까.
설거지하는 동안 그릇들은 빈번히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거렸다.
저마다 담을 수 있는 양도 모양도 제각각인 그릇들. 뭔 놈의 그릇이 이리 많은지,
나는 이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온갖 마음이 딸그랑딸그랑하는 내 속내부터 정리해야지.
*이현호의 <점, 선, 면 다음은 마음>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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